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적 : 제 193 호
元陵의 특징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표 작성중] 뒷 이야기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됩니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을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弘陵의 특징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입니다.
貞聖王后 서씨(徐氏) 약사(略史)
1692년{숙종 18년} 달성(達城) 서씨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704년 숙종(肅宗)의 네 번째 왕자였던 연잉군{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夫人)에 봉해졌고, 세자빈(世子嬪)에 이어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進封)됩니다.
66세의 생을 살았지만 슬하(膝下)에 소생없이 1757년{영조 33년}에 승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