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적 : 제 198 호
明陵의 특징
肅宗{이순; 1661-1720, 재위46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됩니다. 숙종 6년{1680년}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입니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명릉 - 인원왕후릉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과 그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인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을 조성하면서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고 자신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면서 석물(石物)들도 거의 실물의 크기와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습니다.
[표 작성중] 뒷 이야기
재위 46년간 내환(內患)과 사건이 많았던 숙종대는 경신년(庚申年)의 대출척(大黜陟),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옥사(甲戌獄事) 등의 당쟁(黨爭)의 격화가 많았지만, 한편으로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맞이하는 초석(礎石)을 다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곧 대동법(大同法)의 전국적 실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 군제 개편 등의 치적(治績)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슬하의 왕자(王子)가 모두 후궁들에게서 생산되었으니, 경종(景宗)은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영조(英祖)는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생산합니다.
仁顯王后 민씨(閔氏) 약사(略史)
1667년{현종 8년} 여흥(驪興) 민씨 양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태어난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뒤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繼妃)가 됩니다.
궁중(宮中)의 염정애사(艶情哀史)로 알려진 내간체(內簡體) 소설(小說) <인현왕후전>으로 유명하듯이 희빈(禧嬪) 장씨(張氏)와의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갑술옥사(甲戌獄事)의 와중에서 폐위(廢位)와 복위(復位)를 하는 등의 곡절을 겪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합니다.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淸楚)했지만 슬하에 소생은 없었습니다.
仁元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687년{숙종 13년} 경주(慶州) 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태어난 인원왕후는 1701년 인현왕후 승하후 다음해{숙종 28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1713년에 혜순(惠順)이란 존호를 받습니다. 영조대(英祖代)까지 왕대비(王大妃)로 지내다가 1757년{영조 33년}에 71세의 나이로 슬하에 소생없이 승하합니다. 생전에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해 명릉에 함께 조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