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은 조선조(朝鮮朝) 초대(初代)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조성(造成)되면서 왕릉군(王陵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는데,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선정은 태조가 생전(生前)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길지(吉地)를 택하라는 명(命)에 의해 이 곳을 결정했다는 전설(傳說)도 있으나 실제는 태종(太宗)의 명으로 도성(都城)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의정부사(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이 곳에 총 9개의 능에 17위의 왕(王)과 왕후(王后)를 모신 것으로 볼 때 현재 59만평의 광대한 동구릉(東九陵)의 경내(境內)가 풍수학(風水學) 상으로 길지(吉地)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조성된 능은 1452년에 5대 문종(文宗)과 비(妃)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중종 때 복위됨}의 현릉(顯陵)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음은 동구릉 가장 안쪽에 위치한 14대 선조(宣祖)
1608년 조성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
1600년 조성,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632년,인조 10년를 모신 목릉(穆陵)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변형으로 세 언덕에 조성됩니다.
그 뒤 동구릉 가장 남쪽에 18대 현종(顯宗)
1674년 조성과 비(妃) 명성왕후(明聖王后金氏)
1683년, 숙종 9년 조성의 숭릉(崇陵)이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1688년에는 건원릉 서쪽에 4대의 임금대를 살아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불러일으켰던 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의 휘릉(徽陵)이 자리잡게 되어 이때부터 동오릉(東五陵)의 명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후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昇遐)한 후 추존(追尊)된 20대 경종(景宗)의 비(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를 모신 혜릉(惠陵)이 자리잡고, 다음으로 21대 영조(英祖)
1776년 조성와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805년, 순조 5년 조성를 모신 쌍릉(雙陵) 형식의 원릉(元陵)이 조성됨으로써 동칠릉(東七陵)의 명칭도 사용됩니다.
다음으로 24대 헌종(憲宗)
1849년 조성과 비(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43년 조성,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1904년, 광무 8년 조성를 모신 경릉(景陵)은 나란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이 나란하게 자리잡은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능은 조성 작업이 복잡한데, 본래 22대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23대 헌종(憲宗)의 아버지로 추존(追尊)된 익종(翼宗){고종대에 문조(文祖)로 다시 추존}을 모신 수릉(綏陵)은 처음 1830년
순조 30년에 경종(景宗)의 의릉(懿陵) 옆에 조성되었다가 양주(楊洲) 용마봉(龍馬峰) 아래로 옮겨지고 또 다시 철종(哲宗) 6년인 1855년에 건원릉(健元陵) 왼쪽에 조성{비(妃)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는 1878년
고종 15년에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됨}되었기에 조성 시기로는 동구릉의 마지막 능이지만, 익종(翼宗)이 24대 헌종(憲宗)의 친부(親父)로 헌종대에 추존(追尊)되었기 때문에 조선왕릉 순서로는 헌종 앞에 시기를 둡니다. 동구릉(東九陵)의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된 1855년부터입니다.
◾건원릉(健元陵) - 초대 태조 [단릉(單陵)]
◾현릉(顯陵) - 5대 문종과 비 현덕왕후 권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목릉(穆陵) - 14대 선조와 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변형]
◾숭릉(崇陵) -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 김씨 [쌍릉(雙陵)]
◾휘릉(徽陵) - 인조(16대)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단릉(單陵)]
◾혜릉(惠陵) - 경종(20대)의 비 단의왕후 심씨 [단릉(單陵)]
◾원릉(元陵) -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쌍릉(雙陵)]
◾경릉(景陵) -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삼연릉(三連陵)]
◾수릉(綏陵) - 추존 익종과 비 신정왕후 조씨 [합장릉(合葬陵)]